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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ed by Hyun Seungeui

#2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리뷰

2024.9.20

<들풀은 모여서 들판을 만들고>

난생 처음 도착한 요코하마는 항구도시답게 바다 냄새가 물씬 났다. 세계 최대의 차이나타운과 옛 유럽풍 저택들이 건재하여 관광지로도 손색없는 요코하마는 1859년 개항 이후 외국의 물자들이 오가며 다양한 정체성이 혼연되었다. 이동하고 중첩되고 융화되는 도시에서 예술의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2001년 이래 요코하마에서 트리엔날레가 개최될 수 있었던 것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올해로 8회째를 맞이한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의 제목은 ‘들풀 : 우리의 삶(Wild Grass : Our Lives)’이다. 이는 중국의 정치적 현실과 부조리를 직면했던 문학가 루쉰의 <들풀>에서 따온 것이다. 무더기로 번져나가는 들풀의 생명력 너머에는 거친 삶을 살아내는 질긴 투쟁이 있을 터이다. 국제적 위상을 가진 비엔날레나 트리엔날레는 동시대의 가장 치열한 담론을 관람객들에게 제시하는 것을 지향점으로 삼는다. 그러다 보니 환경, 재난, 국가, 전쟁, 여성, 소수자, 노동 등의 담론은 이제 단골 소재가 되었다. 그럼에도 이런 것들에 전혀 싫증이 나지 않는 이유는 각자의 작품으로 발언하는 작가들의 노력이 매번 마음속에 쓰라리게 새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런 점이 시대의 어둠을 반영하고자 했던 루쉰의 문학과 닮아 있어 전시 제목을 그의 작품에서 가져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트리엔날레에서는 유독 내 마음을 깊게 집어삼킨 작품들이 몇가지 있었다. 그 중 첫번째는 Otake Eiko의 <A Body in Fukushima>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그 주변 지역에서 수행된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으로, 영상 속 작가의 모습은 어딘가 구부러졌거나 기대거나 누운 것으로 표현된다. 올해 내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와 관련된 전시를 했기 때문에 이 작업에 더욱 몰입하게 된 점도 있었을 것이다. 작가의 텅 빈 신체와 텅 빈 공간, 그 공허의 방향이 어디로도 흘러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맴돌아 응어리가 되는 듯이 느껴졌다.

Photographed by Hyun Seungeui

한편 Tomiyama Taeko의 판화처럼 분노의 방향이 명확한 작품도 있다. 판화는 민중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르지만, 민중 판화의 계보가 요즘의 젋은 작가들에게까지는 잘 이어지지 않아 흔하게 보기 어려운 장르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마주한 직접적이고 솔직한 판화의 질감은 예술적 발언에 대한 깊은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광주 민주화 운동을 표현한 작품들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포용과 연대를 상기시키기도 했다. 
 

이렇듯 칼처럼 벼린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재치와 당혹스러움으로 관람의 즐거움을 더하는 작품들도 많았다. Aneta Grzeszykowska의 사진 작업들은 일견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그 내막을 알고 나면 피식 헛웃음을 짓게 된다. 무섭게 생긴 괴물은 사실 인간의 탈을 쓴 채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평범한 개다. 뭔가 이상한 엄마와 딸의 모습은 사실 엄마 모양 인형을 사랑스럽게 돌보는 딸의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알고 나면 다소 귀엽다고 느껴질 법한 것들이지만 쉽사리 다가가기 어려운 이유는 평범함의 기준을 살짝 비틀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인 틀 속에서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얼마나 공고하게 쌓아 왔는가? 그리고 그 경계는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가?

 

그러한 질문은 Your Bros. Filmmaking Group의 <Ky Tuc Xa / Dorm> 에서 지속된다. 베트남 노동자들의 기숙사 파업 현장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이 설치 작업은 일상 사물과 파업 피켓으로 꾸며져, 처절하고 강건하게만 비춰지는 투쟁의 공간이 곧 일상의 공간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경계 허물기는 이내 자신과 타인의 경계 또한 무너뜨리고 공감의 영역을 넓힌다. 나는 설치된 침대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파업에 참여했던 노동자들도 이런 자세로 동료들과 수다를 떨었을 것이라 짐작해 보았다. 예술이란 이렇게 손을 맞잡듯 확장되는 이해의 창구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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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ed by Hyun Seungeui

이번 트리엔날레에 참여한 93명의 작가 및 그룹은 각자의 멋대로 자라나는 들풀처럼 일률적이지 않았다. 경직된 예술은 그럴듯한 잔디밭이 될 수 있을지언정, 제각각의 풀들이 모인 풍성한 들판에 비견될 수 없을 것이다. 문득 시인 김수영의 <풀>을 되새겨 보았다. 그의 시에서 풀은 끊임없이 눕는다. 들풀이란 결국 그런 존재일 것이다. 바람에 스치면 눕고 비가 내리면 기울어지는. 그러나 그 속의 뿌리들은 서로 붙잡아 질긴 생을 이어간다. 내가 이번 전시에서 본 것은 국가도, 살아온 환경도 천차만별인 작가들이 이루어낸 들풀 군락이었다. Open Group 의 작품 <Repeat After Me>는 전쟁 병기의 소리를 음성으로 표현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모습을 담아내며 주제와 표현 방식만으로 압도적인 서늘함을 안겨주었으나, 그 작품을 둘러싼 요코하마 미술관 2층 홀의 분위기는 다양한 시각적 제안을 통해 어느 하나의 작품만 고독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전쟁의 참상 그 이상의 연대를 감각할 수 있었고, 작품과 작품 사이의 유기적 관계가 깊은 잔상으로 남았다. 이처럼 올해 요코하마 트리엔날레는 각 작품과 장르를 짜임새 있게 뒤섞은 결속의 장이었다. 서로 뒤얽히고 연결된 들풀 군락을 누가 감히 잘라낼 수 있을까. 행여 잘라낸들 금새 또 싹을 틔우면 그만일 것이다. 3년 뒤에도 그 푸르고 무성한 것들이 끈질기게 이어져 더욱 너른 들판으로 번져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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